사설.칼럼칼럼
몰아서 일하기와 노동시간 유연화에 대한 환상 [아침햇발]
황보연기황보연 기자
- 수정 2025-02-11 18:45
- 등록 2025-02-11 17:05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3일 국회에서 ‘행복하고 정의로운 대한민국, 반도체특별법 노동시간법 적용제외 어떻게?’라는 주제로 열린 정책 디베이트에서 발언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황보연 논설위원
주 52시간 초과근무를 금지한 노동시간 규제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이번엔 반도체특별법 제정의 핵심 쟁점으로 부상하면서다. 논란은 고소득 연구개발 노동자에 대해 규제를 적용하지 말자는 여당의 법안 발의로 촉발됐다. 삼성전자 등 반도체 업계는 주 70~80시간 일하는 대만 티에스엠시(TSMC)와 경쟁하려면 규제를 풀어야 한다며 군불을 지폈다. 결정적으로 중도층 외연 확장을 위해 친기업·실용을 표방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최근 이를 검토하자고 하면서 논란을 키웠다. 그런데 이번 논란은 여러 측면에서 유감이다. 반도체 위기 원인을 왜 경영진 전략 실패가 아닌 노동시간 규제에서 찾느냐는 근본적인 의문은 차치하고서도 그렇다.
우선, 논의의 출발선이 흐릿하다. 유사한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주 52시간 근무’를 기본 전제로 삼는 이들이 보인다. 하지만 우리의 법정 노동시간은 주 40시간이다. 다만 연장근로를 할 경우, 주 12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주 52시간 자체가 예외적 상황이다. 권오성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노동법)는 지난 3일 민주당 주최 정책 토론회에서 “하나는 확실히 하자. 우리나라에 주 52시간이란 제도는 없다. 지금 하는 논의는 옥상옥, 예외의 예외를 만들자는 것”이라고 했다. 근로기준법에는 이미 다양한 예외적 상황을 허용하는 유연근로제도가 마련돼 있다.
둘째로, ‘몰아서 일하기가 왜 안 되느냐’는 질문이 그 무게도 모른 채 난무하고 있다. 노동시간 유연화는 어떤 의도와 환경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유럽 여러 나라에선 노동시간 단축이나 개인의 시간 자율성 증대를 목표로 유연화를 추진해왔다. 독일의 근로시간계좌제를 비롯해 프랑스의 근로시간 적립계좌제도나 네덜란드의 생애과정 자율조정제 등 다양한 형태를 띤다. 사회학자 최희선은 “똑같이 유연근무제가 도입되더라도 노사 간 합의제도가 약하고 사용자 측의 지배력이 강한 사회적 환경에서는 노동시간 유연화 제도가 기업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설계되고 시행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노동시간 유연화와 시간주권의 정치’)
반도체특별법의 경우엔 어떤가. 업계에선 기술 개발 경쟁력을 높이려면 동시다발적이고 복합적으로 발생하는 문제 해결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시간 규제가 발목을 잡는다는 것인데, 반도체 연구소 출신 노동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이들은 이미 주 64시간까지 일할 수 있는 특별연장근로 등을 경험해봤다. 근무시간이 길어진다고 업무 효율이나 생산성이 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몰아서 일하고 나중에 쉬면 된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론 쉽지 않다. 당사자 동의를 받는다지만 회사 분위기에 반하는 행동을 하기 어렵다. 노동자의 시간주권이 후퇴하는 방식의 ‘강요된 유연화’는 삐걱거릴 수밖에 없다. ‘매력적 일자리’가 안 되기 때문에 인재 유출을 부를 것이란 경고마저 나온다.
셋째, 총노동시간만 유지하면 되지 않느냐는 말도 마찬가지로 위험하다. 일단 업계 요구는 노동시간을 더 늘려도 될 만큼 규제를 풀자는 것이다. 만일 총노동시간은 그대로인 방식이라면,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던 ‘연장근로 관리단위 개편’과 별반 다르지 않다. ‘주 69시간 과로 노동’이라는 여론의 역풍을 맞고 좌초된 방안 말이다. 당시 이재명 대표도 “화끈하게 노동하고 화끈하게 망가질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거대 야당 대표의 오락가락 행보가 산업 현장에 자칫 잘못된 정책 신호를 줄까 걱정이다. 이 대표는 10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주 4일 근무’와 ‘특정 영역의 노동시간 유연화’를 동시에 꺼냈다. 당장 반도체특별법에 주 52시간 예외 적용을 수용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모호하다. 여당에선 ‘이 대표의 진심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왔다. 실제로 이 대표의 의중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석이 분분했다. 이런 논란이 길어질수록 실제 제도 개편 여부와 무관하게 현장의 노동시간 규제는 느슨해질 수 있다.
노동시간의 조정은 꼭 필요할 때 매우 신중하게 추진돼야 한다. 노동자 건강권은 물론이고 일과 삶의 균형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특정 영역의 고소득자에 한해서만 규제를 풀면 무엇이 문제냐는 말도 한없이 가볍다. ‘누군가 권리에서 배제되면 모두의 권리가 위태로워진다.’ 노동계의 우려를 귀담아들어야 한다. 이미 업계는 연봉 1억원 미만 직원에게도 규제를 풀자고 한다. 무엇보다 노동시간 유연화에 대한 막연한 환상부터 걷어내야 한다.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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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아서 일하기와 노동시간 유연화에 대한 환상 [아침햇발]
황보연 논설위원
주 52시간 초과근무를 금지한 노동시간 규제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이번엔 반도체특별법 제정의 핵심 쟁점으로 부상하면서다. 논란은 고소득 연구개발 노동자에 대해 규제를 적용하지 말자는 여당의 법안 발의로 촉발됐다. 삼성전자 등 반도체 업계는 주 70~80시간 일하는 대만 티에스엠시(TSMC)와 경쟁하려면 규제를 풀어야 한다며 군불을 지폈다. 결정적으로 중도층 외연 확장을 위해 친기업·실용을 표방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최근 이를 검토하자고 하면서 논란을 키웠다. 그런데 이번 논란은 여러 측면에서 유감이다. 반도체 위기 원인을 왜 경영진 전략 실패가 아닌 노동시간 규제에서 찾느냐는 근본적인 의문은 차치하고서도 그렇다.
우선, 논의의 출발선이 흐릿하다. 유사한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주 52시간 근무’를 기본 전제로 삼는 이들이 보인다. 하지만 우리의 법정 노동시간은 주 40시간이다. 다만 연장근로를 할 경우, 주 12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주 52시간 자체가 예외적 상황이다. 권오성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노동법)는 지난 3일 민주당 주최 정책 토론회에서 “하나는 확실히 하자. 우리나라에 주 52시간이란 제도는 없다. 지금 하는 논의는 옥상옥, 예외의 예외를 만들자는 것”이라고 했다. 근로기준법에는 이미 다양한 예외적 상황을 허용하는 유연근로제도가 마련돼 있다.
둘째로, ‘몰아서 일하기가 왜 안 되느냐’는 질문이 그 무게도 모른 채 난무하고 있다. 노동시간 유연화는 어떤 의도와 환경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유럽 여러 나라에선 노동시간 단축이나 개인의 시간 자율성 증대를 목표로 유연화를 추진해왔다. 독일의 근로시간계좌제를 비롯해 프랑스의 근로시간 적립계좌제도나 네덜란드의 생애과정 자율조정제 등 다양한 형태를 띤다. 사회학자 최희선은 “똑같이 유연근무제가 도입되더라도 노사 간 합의제도가 약하고 사용자 측의 지배력이 강한 사회적 환경에서는 노동시간 유연화 제도가 기업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설계되고 시행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노동시간 유연화와 시간주권의 정치’)
반도체특별법의 경우엔 어떤가. 업계에선 기술 개발 경쟁력을 높이려면 동시다발적이고 복합적으로 발생하는 문제 해결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시간 규제가 발목을 잡는다는 것인데, 반도체 연구소 출신 노동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이들은 이미 주 64시간까지 일할 수 있는 특별연장근로 등을 경험해봤다. 근무시간이 길어진다고 업무 효율이나 생산성이 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몰아서 일하고 나중에 쉬면 된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론 쉽지 않다. 당사자 동의를 받는다지만 회사 분위기에 반하는 행동을 하기 어렵다. 노동자의 시간주권이 후퇴하는 방식의 ‘강요된 유연화’는 삐걱거릴 수밖에 없다. ‘매력적 일자리’가 안 되기 때문에 인재 유출을 부를 것이란 경고마저 나온다.
셋째, 총노동시간만 유지하면 되지 않느냐는 말도 마찬가지로 위험하다. 일단 업계 요구는 노동시간을 더 늘려도 될 만큼 규제를 풀자는 것이다. 만일 총노동시간은 그대로인 방식이라면,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던 ‘연장근로 관리단위 개편’과 별반 다르지 않다. ‘주 69시간 과로 노동’이라는 여론의 역풍을 맞고 좌초된 방안 말이다. 당시 이재명 대표도 “화끈하게 노동하고 화끈하게 망가질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거대 야당 대표의 오락가락 행보가 산업 현장에 자칫 잘못된 정책 신호를 줄까 걱정이다. 이 대표는 10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주 4일 근무’와 ‘특정 영역의 노동시간 유연화’를 동시에 꺼냈다. 당장 반도체특별법에 주 52시간 예외 적용을 수용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모호하다. 여당에선 ‘이 대표의 진심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왔다. 실제로 이 대표의 의중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석이 분분했다. 이런 논란이 길어질수록 실제 제도 개편 여부와 무관하게 현장의 노동시간 규제는 느슨해질 수 있다.
노동시간의 조정은 꼭 필요할 때 매우 신중하게 추진돼야 한다. 노동자 건강권은 물론이고 일과 삶의 균형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특정 영역의 고소득자에 한해서만 규제를 풀면 무엇이 문제냐는 말도 한없이 가볍다. ‘누군가 권리에서 배제되면 모두의 권리가 위태로워진다.’ 노동계의 우려를 귀담아들어야 한다. 이미 업계는 연봉 1억원 미만 직원에게도 규제를 풀자고 한다. 무엇보다 노동시간 유연화에 대한 막연한 환상부터 걷어내야 한다.
whyn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