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세요. 저기 위에 삼성 감시카메라를 향해 자기 소개 부탁합니다.
성공회대학교 노동대학 학장 하종강입니다. 삼성은 이런 일이 역사에 길이 남을 거라는 걸 기억해야 할 겁니다.
시작부터 따끔한 일갈을 해주셨습니다. 선생님이 여기 삼성타운 건설의 산 증인이시더군요. 감회가 어떠신가요.
이제는 이 동네에 자주 올 일이 없지만 전엔 바로 이 앞에 연구소가 있었어요. 삼성타운을 짓느라 땅파기 공사를 하는 걸 봤죠. 삼성 때문에 이 지역 물가가 많이 올라서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피해를 많이 보았어요. 밥값이 비싸져서요.
이 농성장에 경쟁적으로 오는 3대 직종이 있어요.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들, 노무사들, 변호사들인데요. 오늘 이곳은 반올림 지원 노무사 모임 분들이 와주셨습니다. 선생님은 혹시 이런 전문 자격증 같은 게 있으신가요?
제가 일하기 시작할 때는 공인 노무사도 없었고 산업의학과도 없었어요. 많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없었다면 그런 자격증 제도도 생기지 않았겠죠.
야매로 상담을 해오셨나 했더니(웃음), 그 당시에는 그런 제도 자체가 없었군요. 억울하고 속상한 노동자들의 상담을 많이 해오셨을텐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가요?
직업병, 산업재해, 노동재해 관련한 일을 하시는 분들을 만나면 빚진 마음이 들어요. 제가 활동을 시작할 때는 이런 문제가 굉장히 중요했는데 이제 전문적인 분들이 생기면서 손을 뗀 지 오래되었거든요.
기억에 남는 사람 1
당시 구로시장 근처에 산업재해 관련한 모임이 있어 노동법을 교육하러 몇 번 갔어요. 지하 사무실에 습기가 얼마나 심하게 찼는지 비닐 장판에 물이 흥건했어요. 그런 곳에서 팔 잘린 분, 허리 다친 분 등 열 댓 명이 모여서 교육을 받았지요.
어느 날 교육을 하러 갔는데, 수강생 분들이 서로 싸우는데요. 한 분이 다른 노동자한테 하는 말이, ‘넌 팔 짤리고 사천만원 받았잖아. 나는 공장이 망해서 한 푼도 못 받았어’라고 하더군요. 보니까 그 분도 팔이 하나 없더라구요.
그때 느낀 게, 위로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팔이 있는 제가 그분을 위로할 수 없는 겁니다.
기억에 남는 사람 2
노동상담할 때 제일 어려운 게 그런 거예요. 대부분 제가 겪지 못한 일을 겪은 분들이거든요. 특히 나이가 많은데 산재를 당하신 분이요.
어느 날, 사무실 주변을 기웃거리시던 분이 있는데, 나이 지긋한 분이 술도 한 잔 하고 오셨더라구요. 손에 붕대를 감은 채. 손가락 두 개를 잘렸대요. 이 분이 하는 말씀이, 고등학교 다니는 딸 두 명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냐,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냐, 그래서 오늘 산에 가서 소주 두 병 마시고 어디 목 매달 나무 없는지 둘러보고 왔다, 이러시더라구요. 노동재해당한 분들은 정신과 상담도 병행해야 한다고 그때 느꼈어요.
기억에 남는 사람 3
이런 상담을 하면서 만든 두 가지 원칙이, 하나는 우리가 도와준 분들에게서는 쓴 커피 한 잔도 얻어먹지 않는다는 거랑, 밥때가 되어서 오는 노동자에게는 실례가 되지 않는 한 밥을 사준다는 거였는데요. 어떤 분들은 일부러 식사 때를 맞춰서 오기도 해요.
실제로 자주 점심을 먹으러 오던 분이 있어요. 그 사람이 오면 주로 짜장면을 먹었어요. 어느 해 12월 31일, 이 사람이 와서 이번에는 자기가 점심을 사겠다고 해요. 뭐 사줄거냐 했더니 짜장면을 사준대요. 내가 너한테 짜장면 사준게 백그릇은 넘을테니 볶음밥 정도는 먹자고 해서 식당에 갔어요. 같이 간 직원한테도 ‘오늘은 이 사람이 밥 산다더라’ 하고 같이 먹었죠.
근데 이 친구가 나중에 계산할 때 ‘아, 이거 딱 짜장면 두 그릇 값을 벌어왔는데’ 하면서 주머니에서 동전을 좌르륵 꺼내더군요. 정말 힘들게 돈을 모아서 짜장면을 사주러 온 거예요.
기억에 남는 사람 4
88년인가, 제1회 보건의료 워크샵이 열렸어요. 노동재해에 관심있는 의사 간호사 노동운동가 백명 정도가 서울에 모여서, 산업안전보건활동을 위한 공동교육훈련을 하는데, 첫 순서가 서로 소개하는 것이었는데요. 한 남자가 검은 장갑을 끼고 왔는데 자기 소개를 하려고 마이크를 잡으면서 장갑을 벗었더니 손가락 다섯 개가 다 없어요.
그 청년이 하는 말이, ‘저처럼 순간적인 사고로 손가락이 잘리면 산재처리가 됩니다. 그런데 오래 일하면서 수은중독 폐병걸린 사람들은 산재가 안되요. 여기 훌륭한 의사 간호사 많이 오셨는데, 앞으로 수은중독 폐병걸린 사람들이 병원에 오면 잘 치료해주세요’라고 하더라구요. 이런 분조차 안타까와할 만큼 직업병 인정이 참 어려웠어요.
기억에 남는 사람 5
그해 열 다섯 살 문송면이라는 소년이 공장에서 일하다 두달만에 수은중독에 걸렸어요. 직업병 인정받기 참 어렵잖아요. 당시 문송면군은 수은중독으로 뼈속까지 시커멓게 썩었는데도 수은중독에 부합하는 검사 결과가 나오질 않았어요. 그래서 당시 노동과건강연구회에서 노동부 앞에서 가운입은 보건의료인 백명이 모여서 연좌시위를 하자고 밤새 준비를 했어요.
다들 밤을 새워서 사무실에서 집회를 준비하고 있는데, 한밤중에 전화가 왔어요. 송면이가 죽었다고요. 순간 사무실이 조용해졌어요. 그때 계시던 간호사 한분이 이렇게 말했어요. ‘그 새끼들 다 오라그래’. 그리고 다들 병원으로 달려갔어요. 그때 계시던 분들이 나중에 여러 단체들을 만들어 활동을 하게 되었죠.
기억에 남는 사람 6
92년도에는 원진레이온 사건이 있었어요. 인조견이라고, 아주 아름다운 천을 만드는 공장입니다. 일본에 있다가, 각종 기준이 엄격해지니까 한국으로 왔죠. 나중에 어떻게 되었나요. 중국에 갔죠. 당시 회사랑 합의를 했거든요. 중국에 기계를 판매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이미 중국 기술자들이 와서 기계를 뜯고 있더군요.
당시 김봉환씨라는 분의 죽음을 직업병으로 인정받을 때, 그분의 시신을 길에 두고 137일을 싸워 인정을 받았습니다. 드라이아이스를 사다 넣어도 부패를 막을 수가 없어서, 나중에는 관에서 물이 줄줄 나오더라구요.
삼성은 자기네가 굉장히 안전하고 완벽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상당히 무식한 거죠. 현대의학으로도 규명할 수 없는 직업병이 그렇게 많은데 말예요. 우리나라 고등법원에서 이런 판결이 있었어요. 직업병이 아님을 회사가 입증 못하니 직업병이다, 이렇게요. 나중에 대법원에서 파기되었지만요.
이런 일이 있었어요. 프레스에 절단사고를 당했는데, 법정에서 판사가 프레스를 잘 모르잖아요. ‘리미트 스위치가 쇼트가 나서 프레스가 한번 떨어져야 하는데 두번 떨어지면서 손가락이 잘렸습니다’라고 했더니, 판사가 물어보더라구요. ‘왜 손가락을 빼지 않았습니까’라고요. 노동자가 잘못한 게 아닌가 의심을 하는 거죠. 금형이 땅땅땅땅 떨어지는 그 속도를 모르니까 이러는 거예요.
이 사건을 현장검증하러 가서, 변호사가 사업장에 요구했습니다. 프레스를 사고 당시처럼 작동시키고는 판사에게 말했습니다. ‘한번 손을 넣었다 빼 보시지요’. 그제서야 판사가 이해를 하는 거예요.
아뭏든, 설령 노동자가 잘못한 게 있더라도 산업재해는 무과실 책임주의이기 때문에 상관이 없거든요. 직업병과의 연관성이 0.00001퍼센트라도 있으면, 그런 개연성을 가지고 포괄적으로 인정을 해야 하는 거거든요. 그걸 아니라고 우기니 삼성이 무식한 거죠.
위험작업 중지권의 중요성
삼풍백화점이 저기 있었어요. 즐겨 가던 식당이 있는데, 그 사고 나기 두 시간 전에 제가 먹고 나왔어요. 세시 쯤 좀 늦은 점심을 먹으러 5층을 갔더니 왼쪽 절반은 불도 다 끄고 문을 닫아놨는데, 오른쪽 절반은 장사를 하고 있었어요. 그때 이미 왼쪽 절반은 금이 가고 있었는데, 나머지 반을 영업을 하고 있었던 거죠. 당시 5층 바닥 갈라진 틈으로 1층이 보이고 있었는데요. 지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올라오면서 보니까 당시 보석 특가전 같은 걸 하느라고 젊은 알바생들이 엄청 많더라구요. 그렇게 나온 두 시간 지난 뒤에 백화점이 무너진 겁니다.
위험작업 중지권이 얼마나 중요한지 삼풍백화점에서 볼 수 있어요. 한 노동자가 건물에 금이 간 걸 본 거예요. 만일 이 사람이 그런 중지권을 갖고 있었다면, 이 노동자가 주변에 다 알리고 사람들을 다 대피시켰다고 칩시다. 오백여명 죽지 않고 다 살았겠죠.
이걸 다시 느낀 게 세월호예요. 거기 선원들이며 선장 모두 비정규직, 계약직이었고, 심지어 근로계약서도 쓰지 않은 사람도 있었어요. 직접 배를 운전하는 조타수도 6개월 1년 짜리 계약직이구요. 서로들 이름도 잘 몰랐어요. 이런 사람들이 자기 직장에 애정을 가질 수 없죠. 거기 근무했지만 너무 위험해서 퇴직했다는 사람들의 얘기도 많았죠. 그러지 않고 오래 일하면서 위험작업을 중지할 수 있었더라면 이 사고는 막을 수 있었을 거예요. 안산에 가서 어린 학생들의 영정을 볼 때마다, 우리 어른들이 삼풍백화점 사고에서 배워서 고쳤다면 이 아이들이 안 죽었을텐데, 생각했어요.
제가 황상기님을 존경하는 것은, 보상만이 아니라 사과와 예방조치가 중요하다,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삼풍백화점 같은 거죠. 예방조치를 잘 만드는 싸움을 해야 후세에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아요.
겨울이 다가오는 농성장;
오랫동안 싸우는 분들을 보고 ‘그렇게 싸울 힘이 있으면 다른 데 취직해서 돈을 벌지 그러냐’라고 합니다. 물론 그렇게 떠날 수 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죠. 하지만 누군가는 원칙을 지키고 끝까지 싸우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며 버틴 분들도 있어요. 영화 암살에 똑같은 대사가 나오더군요. 독립군 저격수에게 동료들이 ‘이렇게 싸우면 독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냐’ 물었더니 그 저격수가 ‘보여줘야지, 우리가 계속 싸우고 있다는 것을’ 라고 했어요. 가슴이 찡했어요.
만화 ‘송곳’ 구고신 캐릭터의 모델이라고도 하시는데요?
여러 사람들을 모은 캐릭터구요. 그 사람 얘기 중에 제 얘기도 조금 있는 거죠. 촬영장에 가보니까 안내상씨가 구고신 역할을 하던데, 아주 좋아하더군요. 제작발표회에서 ‘내 청년 시절에 못했던 일을 이어서 한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잘 아는 만화가 두 명이 ‘송곳’의 최규석과 ‘신과 함께’의 주호민인데요. ‘신과 함께’라는 만화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자기를 변호할 변호사를 선임하게 되는데, 그 변호사 선임료는 평생 자기가 기부한 만큼의 돈 만큼만 쓸 수 있게 되어 있어요. 저도 그런 정도의 마음이예요. 평생 여러분처럼 살라고 하면 못할 거예요.
학교 다닐 때 김의기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기독교방송 6층에서 유인물을 뿌리고 꽃처럼 떨어져 죽었어요. 계엄군 탱크 위에 떨어졌지요. 그 친구의 유인물에 써있는 문구가 이거였어요.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당시 수배를 당해서 석유배달하며 숨어살다가 잡혀갔었는데요. 나중에 조사 다 받고 나와서 한 선배를 만났더니, ‘똑똑한 놈들은 하도 잘 숨어버려서, 의기의 관을 운구할 사람도 없더라’ 하더라구요. 의기가 그렇게 꽃처럼 떨어질 때 저는 원미동에서 그러고 있었던 거죠.
나중에 죽어서 제가 의기를 만날 거잖아요. 그때, 니가 꽃처럼 떨어져 죽을 때, 나는 그때 원미동에서 그러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중에는 참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어야죠. 죽어서 만나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자, 이렇게 생각하면서 삽니다.
역사에 남을 이야기;
역사에 남을까봐 무서운 얘기가 하나 있어요. 대공 수사관들이 대학교 1학년짜리 저를 무릎 꿇려놓고 물어본 첫 마디가 이거예요. ‘북한 언제 갔다 왔어?’. 대학교 1학년이 정의감에 넘쳐서 유인물 몇 장 뿌렸는데, 대뜸 북한을 언제 갔다 왔냐니요. 그 옆에서 ‘기억 나게 도와주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고문하라는 소리였어요.
근데 그때 저는 운이 좋았어요. 74년이라 유신이 나쁘다는 공감대도 있었고, 대학 교수나 처장, 심지어 총장이 와서 ‘우리가 책임지겟다’고 하고 내보낼 때가 있었어요. 당시에도 그랬어요. 학생처장이 와서 반성문 하나만 쓰면 나갈 수 있다고 했어요. 일곱명이 잡혔는데, 우리는 좀 비겁한 선택을 해서 반성문을 쓰고 나왔어요. 그 반성문이 어딘가 있을텐데, 그게 나중에 어디서 나올까봐 참 무서워요.
반성문이 나오는 순간, 그게 하종강 선생님의 노예문서가 된다는 걸 염두에 두고 열심히 찾아보죠. (웃음) 마지막으로 반올림에 격려와 한말씀 부탁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의사나 공인노무사들이라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면 아무래도 조금 더 관심을 갖지 않을까요?
외국 영화를 보면 할머니 간호사들이 나오는데, 한국엔 할머니 간호사가 없어요. 할머니가 되면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힘들어요. 그래서 할머니 간호사는 없는데, 삼십대에 할머니처럼 오십견을 앓는 간호사는 참 많대요. 간호사 1명당 담당 환자들이 독일의 몇배라고 하죠. 인간의 생명을 구하고 돌보는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대하면 안되죠. 우리가 하고 있는 이런 투쟁은 더 나아가 보건의료 노동자들의 건강과 권리를 위해서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건의료인들이 많이 알아서 더 많이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그런 문제가 가장 심한 게 삼성병원입니다. 메르스가 삼성병원에서 퍼진 건 필연이죠. 여기 이송기사가 메르스 관리 대상에서 빠져있었던 이유가 뭔가요. 파견직이었거든요. 회사가 직접 책임지지 않는다는 거죠.
부산에 강연을 갔는데 한 여중생이 묻더군요.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희망이 있나요?’라고요.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가족에서도, 너무 힘든데, 제가 폼잡고 좋은 얘기만 하는 거 아니냐, 속이는 거 아니냐, 이런 거죠. 그때 여중생에게 했던 같은 얘기를 해보려 해요. 여러분 중에 이 자리 끝나고 집에 가다가, 여기에 와 있다는 이유로 몰래 끌려가서 고문당할 걱정을 하는 분 여기 계십니까? 아니죠. 제가 올해 환갑인데, 환갑이 되기 전에 이런 세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거든요. 너무 고통스러울 때는 이런 긴 호흡으로, 지치지 말고 열심히 합시다.
-끝-
어서 오세요. 저기 위에 삼성 감시카메라를 향해 자기 소개 부탁합니다.
성공회대학교 노동대학 학장 하종강입니다. 삼성은 이런 일이 역사에 길이 남을 거라는 걸 기억해야 할 겁니다.
시작부터 따끔한 일갈을 해주셨습니다. 선생님이 여기 삼성타운 건설의 산 증인이시더군요. 감회가 어떠신가요.
이제는 이 동네에 자주 올 일이 없지만 전엔 바로 이 앞에 연구소가 있었어요. 삼성타운을 짓느라 땅파기 공사를 하는 걸 봤죠. 삼성 때문에 이 지역 물가가 많이 올라서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피해를 많이 보았어요. 밥값이 비싸져서요.
이 농성장에 경쟁적으로 오는 3대 직종이 있어요.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들, 노무사들, 변호사들인데요. 오늘 이곳은 반올림 지원 노무사 모임 분들이 와주셨습니다. 선생님은 혹시 이런 전문 자격증 같은 게 있으신가요?
제가 일하기 시작할 때는 공인 노무사도 없었고 산업의학과도 없었어요. 많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없었다면 그런 자격증 제도도 생기지 않았겠죠.
야매로 상담을 해오셨나 했더니(웃음), 그 당시에는 그런 제도 자체가 없었군요. 억울하고 속상한 노동자들의 상담을 많이 해오셨을텐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가요?
직업병, 산업재해, 노동재해 관련한 일을 하시는 분들을 만나면 빚진 마음이 들어요. 제가 활동을 시작할 때는 이런 문제가 굉장히 중요했는데 이제 전문적인 분들이 생기면서 손을 뗀 지 오래되었거든요.
기억에 남는 사람 1
당시 구로시장 근처에 산업재해 관련한 모임이 있어 노동법을 교육하러 몇 번 갔어요. 지하 사무실에 습기가 얼마나 심하게 찼는지 비닐 장판에 물이 흥건했어요. 그런 곳에서 팔 잘린 분, 허리 다친 분 등 열 댓 명이 모여서 교육을 받았지요.
어느 날 교육을 하러 갔는데, 수강생 분들이 서로 싸우는데요. 한 분이 다른 노동자한테 하는 말이, ‘넌 팔 짤리고 사천만원 받았잖아. 나는 공장이 망해서 한 푼도 못 받았어’라고 하더군요. 보니까 그 분도 팔이 하나 없더라구요.
그때 느낀 게, 위로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팔이 있는 제가 그분을 위로할 수 없는 겁니다.
기억에 남는 사람 2
노동상담할 때 제일 어려운 게 그런 거예요. 대부분 제가 겪지 못한 일을 겪은 분들이거든요. 특히 나이가 많은데 산재를 당하신 분이요.
어느 날, 사무실 주변을 기웃거리시던 분이 있는데, 나이 지긋한 분이 술도 한 잔 하고 오셨더라구요. 손에 붕대를 감은 채. 손가락 두 개를 잘렸대요. 이 분이 하는 말씀이, 고등학교 다니는 딸 두 명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냐,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냐, 그래서 오늘 산에 가서 소주 두 병 마시고 어디 목 매달 나무 없는지 둘러보고 왔다, 이러시더라구요. 노동재해당한 분들은 정신과 상담도 병행해야 한다고 그때 느꼈어요.
기억에 남는 사람 3
이런 상담을 하면서 만든 두 가지 원칙이, 하나는 우리가 도와준 분들에게서는 쓴 커피 한 잔도 얻어먹지 않는다는 거랑, 밥때가 되어서 오는 노동자에게는 실례가 되지 않는 한 밥을 사준다는 거였는데요. 어떤 분들은 일부러 식사 때를 맞춰서 오기도 해요.
실제로 자주 점심을 먹으러 오던 분이 있어요. 그 사람이 오면 주로 짜장면을 먹었어요. 어느 해 12월 31일, 이 사람이 와서 이번에는 자기가 점심을 사겠다고 해요. 뭐 사줄거냐 했더니 짜장면을 사준대요. 내가 너한테 짜장면 사준게 백그릇은 넘을테니 볶음밥 정도는 먹자고 해서 식당에 갔어요. 같이 간 직원한테도 ‘오늘은 이 사람이 밥 산다더라’ 하고 같이 먹었죠.
근데 이 친구가 나중에 계산할 때 ‘아, 이거 딱 짜장면 두 그릇 값을 벌어왔는데’ 하면서 주머니에서 동전을 좌르륵 꺼내더군요. 정말 힘들게 돈을 모아서 짜장면을 사주러 온 거예요.
기억에 남는 사람 4
88년인가, 제1회 보건의료 워크샵이 열렸어요. 노동재해에 관심있는 의사 간호사 노동운동가 백명 정도가 서울에 모여서, 산업안전보건활동을 위한 공동교육훈련을 하는데, 첫 순서가 서로 소개하는 것이었는데요. 한 남자가 검은 장갑을 끼고 왔는데 자기 소개를 하려고 마이크를 잡으면서 장갑을 벗었더니 손가락 다섯 개가 다 없어요.
그 청년이 하는 말이, ‘저처럼 순간적인 사고로 손가락이 잘리면 산재처리가 됩니다. 그런데 오래 일하면서 수은중독 폐병걸린 사람들은 산재가 안되요. 여기 훌륭한 의사 간호사 많이 오셨는데, 앞으로 수은중독 폐병걸린 사람들이 병원에 오면 잘 치료해주세요’라고 하더라구요. 이런 분조차 안타까와할 만큼 직업병 인정이 참 어려웠어요.
기억에 남는 사람 5
그해 열 다섯 살 문송면이라는 소년이 공장에서 일하다 두달만에 수은중독에 걸렸어요. 직업병 인정받기 참 어렵잖아요. 당시 문송면군은 수은중독으로 뼈속까지 시커멓게 썩었는데도 수은중독에 부합하는 검사 결과가 나오질 않았어요. 그래서 당시 노동과건강연구회에서 노동부 앞에서 가운입은 보건의료인 백명이 모여서 연좌시위를 하자고 밤새 준비를 했어요.
다들 밤을 새워서 사무실에서 집회를 준비하고 있는데, 한밤중에 전화가 왔어요. 송면이가 죽었다고요. 순간 사무실이 조용해졌어요. 그때 계시던 간호사 한분이 이렇게 말했어요. ‘그 새끼들 다 오라그래’. 그리고 다들 병원으로 달려갔어요. 그때 계시던 분들이 나중에 여러 단체들을 만들어 활동을 하게 되었죠.
기억에 남는 사람 6
92년도에는 원진레이온 사건이 있었어요. 인조견이라고, 아주 아름다운 천을 만드는 공장입니다. 일본에 있다가, 각종 기준이 엄격해지니까 한국으로 왔죠. 나중에 어떻게 되었나요. 중국에 갔죠. 당시 회사랑 합의를 했거든요. 중국에 기계를 판매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이미 중국 기술자들이 와서 기계를 뜯고 있더군요.
당시 김봉환씨라는 분의 죽음을 직업병으로 인정받을 때, 그분의 시신을 길에 두고 137일을 싸워 인정을 받았습니다. 드라이아이스를 사다 넣어도 부패를 막을 수가 없어서, 나중에는 관에서 물이 줄줄 나오더라구요.
삼성은 자기네가 굉장히 안전하고 완벽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상당히 무식한 거죠. 현대의학으로도 규명할 수 없는 직업병이 그렇게 많은데 말예요. 우리나라 고등법원에서 이런 판결이 있었어요. 직업병이 아님을 회사가 입증 못하니 직업병이다, 이렇게요. 나중에 대법원에서 파기되었지만요.
이런 일이 있었어요. 프레스에 절단사고를 당했는데, 법정에서 판사가 프레스를 잘 모르잖아요. ‘리미트 스위치가 쇼트가 나서 프레스가 한번 떨어져야 하는데 두번 떨어지면서 손가락이 잘렸습니다’라고 했더니, 판사가 물어보더라구요. ‘왜 손가락을 빼지 않았습니까’라고요. 노동자가 잘못한 게 아닌가 의심을 하는 거죠. 금형이 땅땅땅땅 떨어지는 그 속도를 모르니까 이러는 거예요.
이 사건을 현장검증하러 가서, 변호사가 사업장에 요구했습니다. 프레스를 사고 당시처럼 작동시키고는 판사에게 말했습니다. ‘한번 손을 넣었다 빼 보시지요’. 그제서야 판사가 이해를 하는 거예요.
아뭏든, 설령 노동자가 잘못한 게 있더라도 산업재해는 무과실 책임주의이기 때문에 상관이 없거든요. 직업병과의 연관성이 0.00001퍼센트라도 있으면, 그런 개연성을 가지고 포괄적으로 인정을 해야 하는 거거든요. 그걸 아니라고 우기니 삼성이 무식한 거죠.
위험작업 중지권의 중요성
삼풍백화점이 저기 있었어요. 즐겨 가던 식당이 있는데, 그 사고 나기 두 시간 전에 제가 먹고 나왔어요. 세시 쯤 좀 늦은 점심을 먹으러 5층을 갔더니 왼쪽 절반은 불도 다 끄고 문을 닫아놨는데, 오른쪽 절반은 장사를 하고 있었어요. 그때 이미 왼쪽 절반은 금이 가고 있었는데, 나머지 반을 영업을 하고 있었던 거죠. 당시 5층 바닥 갈라진 틈으로 1층이 보이고 있었는데요. 지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올라오면서 보니까 당시 보석 특가전 같은 걸 하느라고 젊은 알바생들이 엄청 많더라구요. 그렇게 나온 두 시간 지난 뒤에 백화점이 무너진 겁니다.
위험작업 중지권이 얼마나 중요한지 삼풍백화점에서 볼 수 있어요. 한 노동자가 건물에 금이 간 걸 본 거예요. 만일 이 사람이 그런 중지권을 갖고 있었다면, 이 노동자가 주변에 다 알리고 사람들을 다 대피시켰다고 칩시다. 오백여명 죽지 않고 다 살았겠죠.
이걸 다시 느낀 게 세월호예요. 거기 선원들이며 선장 모두 비정규직, 계약직이었고, 심지어 근로계약서도 쓰지 않은 사람도 있었어요. 직접 배를 운전하는 조타수도 6개월 1년 짜리 계약직이구요. 서로들 이름도 잘 몰랐어요. 이런 사람들이 자기 직장에 애정을 가질 수 없죠. 거기 근무했지만 너무 위험해서 퇴직했다는 사람들의 얘기도 많았죠. 그러지 않고 오래 일하면서 위험작업을 중지할 수 있었더라면 이 사고는 막을 수 있었을 거예요. 안산에 가서 어린 학생들의 영정을 볼 때마다, 우리 어른들이 삼풍백화점 사고에서 배워서 고쳤다면 이 아이들이 안 죽었을텐데, 생각했어요.
제가 황상기님을 존경하는 것은, 보상만이 아니라 사과와 예방조치가 중요하다,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삼풍백화점 같은 거죠. 예방조치를 잘 만드는 싸움을 해야 후세에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아요.
겨울이 다가오는 농성장;
오랫동안 싸우는 분들을 보고 ‘그렇게 싸울 힘이 있으면 다른 데 취직해서 돈을 벌지 그러냐’라고 합니다. 물론 그렇게 떠날 수 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죠. 하지만 누군가는 원칙을 지키고 끝까지 싸우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며 버틴 분들도 있어요. 영화 암살에 똑같은 대사가 나오더군요. 독립군 저격수에게 동료들이 ‘이렇게 싸우면 독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냐’ 물었더니 그 저격수가 ‘보여줘야지, 우리가 계속 싸우고 있다는 것을’ 라고 했어요. 가슴이 찡했어요.
만화 ‘송곳’ 구고신 캐릭터의 모델이라고도 하시는데요?
여러 사람들을 모은 캐릭터구요. 그 사람 얘기 중에 제 얘기도 조금 있는 거죠. 촬영장에 가보니까 안내상씨가 구고신 역할을 하던데, 아주 좋아하더군요. 제작발표회에서 ‘내 청년 시절에 못했던 일을 이어서 한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잘 아는 만화가 두 명이 ‘송곳’의 최규석과 ‘신과 함께’의 주호민인데요. ‘신과 함께’라는 만화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자기를 변호할 변호사를 선임하게 되는데, 그 변호사 선임료는 평생 자기가 기부한 만큼의 돈 만큼만 쓸 수 있게 되어 있어요. 저도 그런 정도의 마음이예요. 평생 여러분처럼 살라고 하면 못할 거예요.
학교 다닐 때 김의기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기독교방송 6층에서 유인물을 뿌리고 꽃처럼 떨어져 죽었어요. 계엄군 탱크 위에 떨어졌지요. 그 친구의 유인물에 써있는 문구가 이거였어요.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당시 수배를 당해서 석유배달하며 숨어살다가 잡혀갔었는데요. 나중에 조사 다 받고 나와서 한 선배를 만났더니, ‘똑똑한 놈들은 하도 잘 숨어버려서, 의기의 관을 운구할 사람도 없더라’ 하더라구요. 의기가 그렇게 꽃처럼 떨어질 때 저는 원미동에서 그러고 있었던 거죠.
나중에 죽어서 제가 의기를 만날 거잖아요. 그때, 니가 꽃처럼 떨어져 죽을 때, 나는 그때 원미동에서 그러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중에는 참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어야죠. 죽어서 만나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자, 이렇게 생각하면서 삽니다.
역사에 남을 이야기;
역사에 남을까봐 무서운 얘기가 하나 있어요. 대공 수사관들이 대학교 1학년짜리 저를 무릎 꿇려놓고 물어본 첫 마디가 이거예요. ‘북한 언제 갔다 왔어?’. 대학교 1학년이 정의감에 넘쳐서 유인물 몇 장 뿌렸는데, 대뜸 북한을 언제 갔다 왔냐니요. 그 옆에서 ‘기억 나게 도와주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고문하라는 소리였어요.
근데 그때 저는 운이 좋았어요. 74년이라 유신이 나쁘다는 공감대도 있었고, 대학 교수나 처장, 심지어 총장이 와서 ‘우리가 책임지겟다’고 하고 내보낼 때가 있었어요. 당시에도 그랬어요. 학생처장이 와서 반성문 하나만 쓰면 나갈 수 있다고 했어요. 일곱명이 잡혔는데, 우리는 좀 비겁한 선택을 해서 반성문을 쓰고 나왔어요. 그 반성문이 어딘가 있을텐데, 그게 나중에 어디서 나올까봐 참 무서워요.
반성문이 나오는 순간, 그게 하종강 선생님의 노예문서가 된다는 걸 염두에 두고 열심히 찾아보죠. (웃음) 마지막으로 반올림에 격려와 한말씀 부탁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의사나 공인노무사들이라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면 아무래도 조금 더 관심을 갖지 않을까요?
외국 영화를 보면 할머니 간호사들이 나오는데, 한국엔 할머니 간호사가 없어요. 할머니가 되면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힘들어요. 그래서 할머니 간호사는 없는데, 삼십대에 할머니처럼 오십견을 앓는 간호사는 참 많대요. 간호사 1명당 담당 환자들이 독일의 몇배라고 하죠. 인간의 생명을 구하고 돌보는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대하면 안되죠. 우리가 하고 있는 이런 투쟁은 더 나아가 보건의료 노동자들의 건강과 권리를 위해서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건의료인들이 많이 알아서 더 많이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그런 문제가 가장 심한 게 삼성병원입니다. 메르스가 삼성병원에서 퍼진 건 필연이죠. 여기 이송기사가 메르스 관리 대상에서 빠져있었던 이유가 뭔가요. 파견직이었거든요. 회사가 직접 책임지지 않는다는 거죠.
부산에 강연을 갔는데 한 여중생이 묻더군요.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희망이 있나요?’라고요.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가족에서도, 너무 힘든데, 제가 폼잡고 좋은 얘기만 하는 거 아니냐, 속이는 거 아니냐, 이런 거죠. 그때 여중생에게 했던 같은 얘기를 해보려 해요. 여러분 중에 이 자리 끝나고 집에 가다가, 여기에 와 있다는 이유로 몰래 끌려가서 고문당할 걱정을 하는 분 여기 계십니까? 아니죠. 제가 올해 환갑인데, 환갑이 되기 전에 이런 세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거든요. 너무 고통스러울 때는 이런 긴 호흡으로, 지치지 말고 열심히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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