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계를 상상하라

- 고 황유미 님 11주기 추모제를 맞아

송경동

삼성이라는 국가를 상상해 본다

감별된 사원증을 가져야만 출입할 수 있는

또 다른 제국을 상상해 본다

반도체라는 집중을 맹목을 상상해 본다

반도체라는 공권력을 상상해 본다

반도체라는 냉엄한 속도와 통계와 계산을 상상해 본다

새하얀 크린룸이라는 이데올로기

화학물질이라는 수많은 부역자들

발암물질이라는 무지와 폭력

그들이 추구하는 이윤의 맨 얼굴을 상상해 본다

그들이 추구하는 무한한 축적의 비정함을 상상해 본다

그들이 추구하는 무한한 독점의 이상을 상상해 본다

번호 1번 황유미,

꺽여버린 스물 세 살의 봄을 생각해 본다

번호 3번 황민웅,

짓밟혀버린 스물 여섯 살의 여름을 생각해 본다

번호 80번 이혜정,

짓이겨져버린 마흔 살의 가을을 생각해 본다

118번의 죽음이라는 차디찬 겨울을 생각해 본다

아름다운 꽃을 노래를

아름다운 바다와 광야를 상상해 보지 못하고

분노와 증오와 고통과 끝없는 시름과 투쟁을 상상해야 하는

이 부정하고 불의한 세상을

우리는 어떻게 세정해야 할까

어떤 방진복을 입어야

우리의 삶이 안전할 수 있을까

어떤 화공약품으로 딲아야

자본이라는 이 더러운 기생균이

우리의 몸에서 떨어질까

몇 번을 더 삭발하고 굶고 점거하고 절하고 끌려가고 올라가야

11년 882일의 농성이 끝이 날까

모두의 꿈과 기회와 노동을 뺏어 쌓아올린 저 왕국

우리 모두의 뇌와 폐와 뼈와 신경을 뺏어 쌓아올린 저 빌딩

우리 모두의 인권과 권리를 뺏어 쌓아올린 저 권력

그러나 끝내 무너져 내릴 저 허상

그러나 끝내 벗겨지고 말 저 위선

황유미가 돌아온다

희망의 거대한 발걸음이 되어

황유미가 돌아온다

다시는 짓밟히지 않는 꿈으로

다시는 유린당하지 않는 강고함으로

보라. 다시 시대의 봄이 돌아온다